김두환명예회장
기본정보   이름: KATO      등록일: 2010-07-13 14:54:51     조회: 4664


 

 

 

 

 

 

 

 

 

 

 

 

 

 

 

 

 

 

 

 

 

 

 

 

 

 

 

 

 

 

 

 

 

 

 

 

 

 

 

 

 

 

 

 

 

 

 

 

 

 

TENNIS HISTORY(6)

한국테니스 발전과 괘를 같이한 김두환 전 대한테니스협회장

경기인 출신 대한테니스협회장 '1호'
한국테니스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 기록 보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코치에게 지도 받아


대한테니스협회장을 지낸 김두환 회장은 국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테니스 행사장마다 찾아 자리를 빛내고 대회를 빛내왔다.

한국테니스사에서 1호 기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김 회장은 한국테니스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김회장이 가는 곳이 한국테니스가 되고 테니스 역사가 된다.

 

김 회장은 체육단체의 어려운 시기에 경기인 출신으로 대한테니스협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전일본선수권에서 양정순씨와 혼합복식에 출전해 우승을 했다.

 

우리나라 테니스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 기록을 김 회장이 보유하고 있다.

그밖에 김 회장이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 국내에 첫 외국인 코치로부터 테니스 기량을 연마하는 등 우리나라 테니스의 행운아 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과 역사를 지닌 한국테니스의 산 증인 김두환 전 회장(이하 존칭 생략)을 자택에서 만나 남기고 싶은 테니스 이야기를 녹취했다.


연식 정구에서 테니스로

김두환은 원래 연식 정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연식 정구에서 테니스로 바꾼 계기가 특이하다.

부산 동래고에서 연식정구 선수로 전국체전 선발전을 했는데 탈락했다.

당시 부산에서 서울 올라가기가 지금 외국 나가기보다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서울에 가고 싶어 한 것을 안 선배가 테니스로 바꿔 출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테니스를 일주일 연습해 부산 대표에 뽑혀 서울 구경을 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올라온 김두환은 동대문운동장 2면에서 치러진 체전에서 도 대표로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냥 내려가기엔 너무 허전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주최 테니스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이것이 김두환 회장이 테니스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회전에서 4-6으로 졌다. 해보니 별거 없어 보였다. 그동안 잘하는 고등학생들을 조금만 하면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겨우내 테니스에 몰두하게 된 결과 이듬해 부산에서 열린 종별테니스대회에서 동래고 대표로 출전해 당시 최강인 휘문고 등을 이기고 우승해 테니스의 재능을 충분히 인정 받았다.


청계천변 중고 라켓

해방 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축구를 했던 부친은 서울 청계천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미제 스팔딩 중고라켓을 구해 주며 격려했다. 이러한 격려와 노력으로 김두환은고3때 어느 대회든 나가면 우승이었다.

선배들을 잇따라 제압 김두환의 기량을 눈여겨본 선배들이 대회도 있고 선수층도 두터운 서울로 김두환을 불러 들였다.
서울로 올라온 김두환은 당시 기라성 같은 실력을 지닌 대표선수 박도성을 상대로 후암동 한국은행 코트에서 연습 경기를 해 기량을 차츰차츰 늘렸다.

어깨 너머로 배우고 연식에서 익힌 볼에 대한 감각을 살린 결과 대학 1학년 때 대표 선수 박도성을 연습 경기에서 이겨 김두환은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것은 테니스 한 지 3년만에 대표선수가 되게 했다.


경기력 향상

테니스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김두환은 고민이 있었다.

그립이었다. 연식 정구에서 하던 식으로 라켓 그립을 잡으면 경기가 잘되는 반면 테니스 그립으로 라켓을 잡으면 잘 안되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테니스그립으로 경기를 이길 수 있을까 고심을 했다. 진인사대천명일까. 어느날 꿈속에서 그립을 바꿔 테니스를 하니 잘 되는 장면이 연출됐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자 꿈속에서 본 그립을 그대로 잡고 테니스를 하니 공이 원하는 데로 시원스레 날라갔다.
대학 2학년 때인 1962년에 전한국선수권 단식에서 우승하고 서른 넘은 선배 대표 선수들을 현역에서 물러나게 했다.


재일교포 임충량

김두환은 테니스를 하면서 귀인을 많이 만난 행운아다.

그 한 명이 일본 법정대 출신 임충량이다.

우리나라보다 일찍이 테니스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테니스를 익힌 임충량은 현해탄을 건너 온 뒤 출전한 전한국선수권 단식부문에서 63년부터 66년까지 내리 4년간 우승했다.

앞서 길인형, 이상연 등 한국테니스 1세대들이 6연패씩을 했지만 임충량 이후 한국선수권에서 4연패를 한 선수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아 당시 임충량의 테니스 기량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김두환은 전일본선수권에서 임충량을 만나 한일은행으로 나란히 입단해 선진 테니스를 전수받았다. 처음에 세 게임 정도 밖에 따지 못할 정도로 임충량의 기량은 출중했지만 같이 연습한 뒤 1년 만에 이기는 일도 벌어져 임충량은 김두환의 테니스 기량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국내 첫 외국인 코치, 오하라 겐조

김두환의 두번째 테니스 귀인을 꼽으라면 국내 최초로 영입해 지도를 받은 일본인 오하라 겐조 코치다.
오하라 코치는 대한테니스협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기간은 한 달간. 협회는 국가대표급 선수 10명을 선발했다. 오하라 코치는 서울 안암동 산업은행 코트에 모인 국내

남녀 대표급 선수들에게 기술지도와 체력훈련을 시켰다. 오하라 코치는 김두환이 체력이 약한 것을 간파하고 달리기만 줄창 시켰다. 한 달의 훈련이 끝나고 나서 김두환은 하루에 8~9세트를 해치울 수 있는 체력의 소유자로 탈바꿈했다. 코트에서 뛰는 김두환을 놓고 바람소리가 난다고 주위에서 평할 정도로 확 바뀌었다.
이는 김두환을 60년대 국내 1인자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국제 경기

김두환은 당시 국내에선 1인자였지만 벽이 높은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특히 일본과의 테니스 격차는 무척 커서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천신만고 끝에 1세트를 따내면 책임 완수했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어선지 나머지 세트를 내리 내줘 패하기 일쑤였다.


한국테니스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
전일본선수권 혼합복식 우승

김두환은 국민은행의 양정순과 함께 1969년 11월 13일 일본 도쿄 전원코트에서 열린 전일본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 출전해 일본랭킹 6위인 모리와 10년간 일본 여자선수권을 갖고 있는 미야기 조를 2-0(7:5/7:5)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우리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거둔 우승이었다.

귀국 후 환영행사도 성대하게 열렸다. 협회 홍종문 부회장은 결승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으로 건너와 선수들을 격려했다. 결국 우승까지 해 평소 “일본 테니스를 이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 장호는 생전에 일본 테니스를 이기는 것을 일본 현지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선수생활

김두환은 1967년 봄, 필리핀과의 데이비스컵 경기를 끝내고 26살 나이에 은퇴를 결심했다. 단식과 복식에 모두 출전했지만 3패를 한 김두환은 한계를 느꼈다.

스무 살에 데이비스컵 대표가 되어 소속 은행의 출장 경비 지원을 받아 대회에 출전했다. 인도, 필리핀, 일본 등과의 경기에서 번번이 패한 뒤 면목이 없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데이비스컵에 가는 것조차도 협회 임원들이 은행에 전화로 청탁해 간신히 경비를 마련했다. 선수생활을 접고 은행 근무를 했지만 얼마 안 있다가 데이비스컵 전력 강화를 위해 다시 협회로부터 호출을 당해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에 운동을 하는 시스템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김두환은 대표팀으로 활동을 재개하면서 국내 대회에도 출전했지만 준결승, 결승까지는 올라 가는데 운동량이 부족한 탓에 우승을 하지 못하자 1971년에 선수생활을 완전히 접었다.


홍종문 회장과 장충테니스코트에 대한 추억

1970년 이전에 서울에는 산업은행과 한국은행 코트, 서울의대 코트, 동대문운동장 코트가 고작이었다. 테니스가 널리 보급되고 대회가 생기면서 협회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코트가 10면 정도 있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당시 대한테니스협회 홍종문 회장은 "땅만 마련되면 테니스코트를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이종갑 테니스협회 부회장이 서울시와 논의해 현재 장충코트 부지를 얻어냈다. 이제 문제는 코트를 만드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부지를 얻어내기 전에 홍종문 회장이 타의에 의해 회장직에서 물러나 더 이상 테니스협회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협회 관계자들은 홍종문 회장을 찾아가 코트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자 "이전에 내가 약속했으니 내가 해야지" 하면서 흔쾌히 약속을 했다.

그래서 장충테니스코트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테니스를 좋아했으면 코트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을까. 홍 회장은 코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믿을만한 사람에게 현장소장을 맡기고 저녁마다 코트에 들러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마음에 담았다.

코트 마련에 필요한 골재는 터널 뚫으면서 생긴 것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고 소강 민관식 장관은 장충코트를 만든 홍종문 회장에 대해 "지독하게도 물질을 아끼는 사람이 테니스에는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

1 1959년 가을 서울상대주최 제36회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이 트로피는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서울상대 동창회장 자격으로 최우수선수상 컵을 기증했다. 테니스 경기를 할 때 교모를 쓰고 한 것이 특이했다

2 경기 모습

3 한일은행 시절 재일교포 출신 임충량(왼쪽)과 김두환. 임충량은 데이비스컵 대표를 지냈고 일본에서 선진 테니스를 익혀 한 수위의 기량을 선뵈었다 임충량이 입고 있는 브이넥 셔츠는 당시 유행한 복장이었다

4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 코치를 영입해 한달간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일본 아사히 생명의 오하라 겐조 감독이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국내 언론에 기고를 했다

5 1965년 일본 아사히 생명 남녀 테니스 팀이 방한해 교류전을 가졌다. 오른쪽 두번째가 오하라 겐조 감독

6 전일본선수권 혼합 복식 결승전에 앞서 일본 선수와 코트에 나란히 서서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김두환 양정순 그리고 일본 선수들

7 혼합복식 시상식은 경기 다음날 치러졌다. 운동복이 아닌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김두환이 상장을 받아 들었다

8 김두환 회장이 소중히 간직한 사진이다. 전일본선수권 혼합복식에서 결승에 진출했다고 하자 홍종문 전 대한테니스협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고 소강 민관식 장관이 서울에서 날라와 경기에 참석하고 우승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홍 회장은 당시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좋았던지 연락을 받자 마자 일본에 와서 경기를 지켜봤다. 김 회장은 이 사진을 장호기념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9 우리나라 테니스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하고 귀국하자 김포공항에서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왼쪽부터 박길식 국민은행 감사 김두환(한일은행) 양정순(국민은행) 김성배(성대) 고본순(국민은행) 홍종문

10 전일본선수권 혼합복식 우승 기사

11 일본선수권 혼합복식 우승 트로피

12 정일권 국무총리실에서 데이비스컵 추첨식을 가졌다. 데이비스컵 대진추첨식을 국무총리실에서 한 이유는 당시 데이비스컵 규약에 따라 주최국 수상이 추첨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규정에 따라 국무총리실에서 추첨식을 가졌다

13 전한국선수권 복식 우승 트로피

14 전한국선수권 단식 우승 트로피. 우승자가 트로피를 1년간 보유하고 다음해에 반납한다. 김두환 회장이 이 트로피를 갖게 된 것은 우승한 뒤 다음해 트로피를 새로 만들어 반납할 이유가 없어 계속 보유하게 됐다

15 김두환 회장의 테니스 라켓



김두환 회장은

1942년 2월12일 평북 신의주 출생
60년 동래고 졸업
62년 한일은행 입단
67년 성균관대 상과대 졸업
62년~67년, 69년, 71년 데이비스컵 출전
(데이비스컵 성적 2승15패)
62년,69년 전한국선수권 단식 우승
65년~66년, 68년~70년 전한국선수권 복식 우승
77년~78년 데이비스컵 감독
78년~83년 대한테니스협회 경기이사
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 감독
83년~87년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이사
89년~92년 대한테니스협회 부회장
93년~2001년 대한테니스협회 19대, 20대 회장, KOC 상임위원, 협회 명예회장
2004년~2009년 시니어연맹 회장


김두환 회장의 한국테니스에 대한 한마디

한국테니스가 발전하려면 스타가 나와야 한다.
스타가 나오게 하려면 첫째 테니스 외에 다른 운동을 할 것이 없는 지역을 골라 테니스를 할 수 있게 집중 지원 육성해야 한다. 특출난 선수가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인구 3만의 전북 남원이 테니스로 유명한데 당시 남원중 남원여중 남원여고에 테니스부가 있었다.

좋은 선수들이 나와 전국을 제패하니 테니스에 관심이 많았다.

장영보 김문일 차철남 김춘호 최종현 이덕희 이순오 이미옥 등 남원에서 테니스를 해 한국 테니스를 빛냈다.


테니스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양구, 김천, 순창 등에 테니스를 집중 지원, 육성해 선수를 발굴하면 기린아가 나올 수 있다.
대도시에는 운동에서 특출난 선수가 나오면 야구 축구 등 프로종목에서 스카우트한다. 그래서 대도시 좋은 자원들이 테니스를 선택하기 어렵다.

두번째로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려야 한다.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에게 집중 투자해 투어 선수를 만들어야 한다. 챌린저 우승한 임용규를 집중 투자하고 관심을

가져 키워야 한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만들려면 소수정예로 육성해야 효과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30위나 50위권 정도로는 테니스 붐을 일으킬 수 없다. 그 이상을 해야 붐이 일어난다.

 

 

글 박원식 기자 사진 최대일 실장(스튜디오UP)


출처 : 테니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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